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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왜성 1

이은상 × 차준호

*퐄챠가 사촌지간으로 등장합니다. 예민하신 분은 피해주세요!* 




"엄마는… 잘 계시지?"


 꽤 길게 이어지던 정적을 깬 물음에 느리게 이어가던 젓가락 질이 멈칫했다. 은상은 고개를 들어올리고 맞은 편에 자릴 잡고 앉은 제 고모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만 해도 바쁜 엄마를 대신해 항상 저를 챙겨주던 그녀였다. 엄마가 재혼을 하며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 탓에 7년 만에 만나게 되었지만, 고모는 그때나 지금이나 은상을 바라보며 자꾸만 눈가에 눈물을 맺었다. 은상의 아빠이자 그녀의 오빠가 불의의 사고로 허망하게 세상을 등지고 난 뒤에 생긴 버릇이란걸, 은상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럼요. 잘 지내세요."

"그래. 그럼 다행이다…. 아, 국 더 줄까?"

"아뇨, 괜찮아요." 

"준호는 거의 다 왔대. 곧 도착할거야. 학교가 멀지 않아서 자전거 타고 다니거든."

 

 고모는 손등으로 얼른 눈물을 찍어내곤 애써 웃음지어 보였다. 다급히 말을 돌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은상은 그런 고모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그러나 머리 속에선 조금 전 귓가에 닿았던 두 글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준호. 제 사촌 동생의 이름이었다. 

 





백색왜성 1

w. lovesome 







"나쁜 새끼…." 


  7년 만에 만난 사촌 형에게 건네는 인사치곤 어감이 그리 좋지 못했다. 나름 기대하고 있던 재회의 순간에 처음 듣게 된 말이 나쁜 새끼라니…. 그러나 은상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눈앞의 소년을 바라볼 뿐이었다. 얼마나 달려왔는지, 턱까지 차오른 가쁜 숨을 몰아 쉬는 그 모습은 잊고 있던 지난 시간들을 그대로 돌려놓은 것처럼 익숙하게만 느껴졌다. 얼마나, 어떻게 변했을까. 지난 7년 동안 수도 없이 머릿속으로 상상해왔던 것들이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소년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였다. 하얀 얼굴도, 유난히 왜소하던 체격도, 사소한 일에도 눈에 눈물을 달던 그 여린 습관들도. 


"한국말 다 까먹기라도 했어? 뭐라고 말 좀 해봐, 이 나쁜 새끼야."


  두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모질게 쏟아내는 말들이 진심이 아니란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은상은 그저 소년을 바라볼 뿐이었다. 늘 은상의 뒤를 졸졸 쫓아 다니던 어린 날의 모습이 지금의 소년과 오버랩되며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분이 들게 했다. 은상은 망설이던 손끝을 소년의 갈색빛 머리칼 위로 뻗었다. 손가락 사이로 스치는 부드러운 감촉에 그제서야 웃음이 나왔다. 


"예쁘게 컸네…. 내 울보."

 

  

 


** 



 

"이은상 입니다."


 자기 소개를 하라는 담임의 말에 고작 이름을 말한 게 전부였다. 미국에서 살다 전학을 왔다는,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전학생의 존재가 눈앞에 등장하자 모두들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며 은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들 속에 포함되지 않은 건 준호만이 유일했다. 맨 뒷자리에 턱을 괴고 앉아 창밖을 가만히 바라보는 준호는 애써 그런 은상을 외면하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미 함께 학교에 들어서던 순간부터 모두의 관심이 은상을 향해 있는게 영 아니꼬왔다. 은상의 전학 수속을 하는 동안 죽을상을 쓰고 앉아있는 준호를 향해 도대체 뭐가 그렇게 못마땅하냐, 묻는 엄마의 물음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은상이 모두의 관심 속에 있는게 왜 그렇게 배알이 꼴리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으니 말이다.  


"은상이랑 준호랑 사촌 지간이라고 했지?"


 담임의 말에 은상을 향해 있던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동시에 준호에게로 옮겨갔다. 그제서야 내내 창밖에 두었던 준호의 눈동자가 은상을 향했다.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마주친 눈동자에 은상은 깊은 팔자주름을 만들며 미소짓고 있었다. 


"네."


 퉁명스레 던진 준호의 짧은 대답 하나에 담임은 준호의 옆자리에 가서 앉으라며 친절히 은상을 안내했다. 나이가 지긋한 담임 조차도 전학생 이은상이 꽤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은상은 누가 보아도 유복한 집안에서 잘 교육 받고 자란 아이같았다. 미국이라는 멀고 먼 이국 땅에서 살다 왔다는 것부터가 그랬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유난스러운 것은 은상의 잘생긴 외모였다. 반듯하게 접힌 셔츠의 깃과 목 끝까지 잘 잠겨진 단추. 그리고 그 위로 자리잡은 해사한 미소 마저도. 그 모든 게 미처 겪어보지 않고도 충분히 좋을 은상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 교복 처음 입어봐. 진짜 떨린다." 

"병신. 떨릴 일도 많다."


 제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는 은상을 보며 준호는 못마땅히 중얼거리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제 기분이 왜 이렇게 밑바닥을 치고 있는지에 대해 스스로 고민을 시작했다. 이게 다 이은상 때문이었다. 한 살이나 많은 주제에 기어코 저와 같은 2학년으로 전학을 온 것부터가 못마땅했다. 한살 어린 녀석들이 친구처럼 허물없이 대해도 사람 좋게 웃고만 있겠지. 기집애들이 호기심어린 눈빛을 빛내며 달라붙어도 절대 거절따윈 못하고 그저 웃고만 있을 게 뻔했다. 그 꼴을 남은 학교 생활 내내 보고 있어야 하다니…. 준호는 그제서야 왜 기분이 하루종일 별로였는지 깨닫고 말았다. 7년만에 다시 차지한 이은상을 다른 녀석들의 시선 속에 두고 싶지 않았나 보다. 7년 전이나, 7년이 지난 지금이나… 이은상은 여전히 빛나고 있으니까. 







** 



"은상이 너 미국 어디에서 살다 왔어?"

"미국은 몇 살 때 간 거야?"

"부럽다. 공부 안해도 영어는 1등급이겠네?" 


 역시나였다. 매 쉬는 시간 마다 다른 반 여자애들까지 족히 열다섯은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모두 은상의 주위로 몰려들어 아주 취재를 하고 있었다. 덕분에 옆자리에 앉은 준호만 짜증이 났다. 안그래도 이꼴을 보기 싫었던 건데, 옆에서 대놓고 듣고 있으려니 잠자는 척하며 책상 위로 파묻었던 얼굴을 자꾸만 들어올리는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은상아. 나 앞으로 영어 모르는 거 너한테 물어봐도 돼?

 은상아. 너 근데 차준호랑 진짜 사촌이야? 

 은상아. 은상아. 은상아. 다들 애타게도 불러대는 그 이름에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아, 쫌!!" 


 결국 더이상 참지 못하고 책상을 요란스레 쳐내며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덕분에 은상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준호를 향했다. 


"야. 이은상 열아홉 살이야. 그러니까 니네 다 형, 오빠라고 불러라?" 


 준호는 머리 끝까지 솟구치는 짜증을 작은 얼굴에 여과없이 담고서 은상을 내려다 보았다. 주변 아이들의 표정은 지나 뭔데 저러나, 하는 황당과 당황의 빛을 띠고 있었으나 준호의 시선엔 오직 이은상 하나만 보였다. 애써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입모양으로 준호야 너 왜그래, 하고 있었다. 병신. 왜그러긴 왜 그러겠냐. 

 

"야, 이은상. 일어나. 매점 가자." 

"어? 어어." 


 교실을 나서는 준호의 뒤를 쫓아 몸을 일으켜 세우며 은상은 아이들에게 미안. 하고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남겨진 아이들은 사촌이면 사촌이지, 지가 뭔데 정색을 때리냐며 준호를 신나게 까기 시작하겠지만 상관없었다. 이은상을 다시 독차지하고 교실 밖으로 탈출하고서야 숨통이 트이는 걸 느꼈으니까. 


"나 진짜 짜증나."

"뭐가 그렇게 또 불만인데."

"니가 젤 불만이야, 니가. 등신처럼 어린 애들이랑 친구 먹고 싶냐?"

"상관없어. 어차피 미국에서는 나이 상관없이…"

"여기가 미국이냐? 어?"


 은상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제 불만을 토로하는 준호의 뒷모습을 보며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두어 발자국 정도 앞서 걷고 있는 준호를 따라잡곤 몸을 돌려 섰다. 그리곤 그때부터는 불만 가득한 준호의 얼굴을 마주한 채로 뒷걸음 하며 준호와 속도를 맞춰 걷기 시작했다. 


"차준호 아무튼 여전히 집착 쩔어."

"뭔 소리야."

"너 어릴때도 내가 다른 애들이랑 친하게 지내는 거 엄청 싫어했잖아."

"뭔 소리야. 내가 언제." 


 퉁명스레 아닌척 대꾸하고 있었지만 사실 준호도 기억하고 있었다. 같은 주택 단지 안에 살며 같은 유치원, 같은 학교, 같은 학원을 전전하던 둘은 친형제보다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친형제는 커녕 사촌이라는 것 조차도 믿지 못할 만큼 너무도 다른 외향과 성격을 갖고 있던 탓에 '하나도 안닮았어.' 하는 말을 내내 듣고 자랐다. 그 어린 나이에도 만인에게 친절하고, 모두에게 사랑을 받던 이은상과 심술과 고집을 덕지덕지 달고서 그런 은상 옆에만 딱 달라붙어 있던 차준호였으니 말이다. 


"형도 친구 좀 사귀자, 준호야. 응?"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뒤돌아 걷던 은상이 개구지게 웃으며 준호의 얼굴 앞으로 제 얼굴을 왔다 갔다 한다. 응? 응? 응? 몇 번이고 되묻는 말에도 준호는 차마 그러라고 하지 못했다. 싫어. 싫어. 싫어. 열 한 살 어린 시절처럼 떼를 쓰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 낼 뿐이었다. 


"전학 첫 날부터 친구는 무슨 친구야." 


 퉁명스레 중얼거리는 준호를 보면서도 은상은 여전히 웃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튼 상황과 상관없이 늘 웃는 얼굴인 것도 마음에 안 든다니까. 창가로 들어서는 환한 햇살 안으로 자리잡은 그 웃는 얼굴이 참 미우면서도 미워할 수가 없어서, 결국 애써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웃음을 터트려냈다. 


"기분 좀 풀렸어?"

"아니, 아직. 나 아이스크림 사줘." 

"그래. 너 메로나 좋아했잖아. 지금도 좋아해?"

"응. 기억 하고 있었어? 너는 바나나 우유 좋아했잖아."

"응. 맞아. 나 매일 사 먹었었잖아. 너도 다 기억 하네?" 


 이어지는 대화들에 방금 전 교실에서 있었던 짜증나는 상황들이 하나씩 다 잊혀지는 기분이었다. 서로의 사소한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건 준호에겐 왠지 특별했다. 이 학교에 있는 그 누구도 모를 이은상의 어린 시절을, 오직 차준호만이 알고 있었으니까.


"준호야."

"응."

"나는 너에 대해 잊은 거 하나도 없어." 


 은상은 여전히 주머니에 깊게 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갔다. 나 한국 완전 그리워 했거든. 덧붙이는 말에 준호는 괜히 눈가가 시큰 거리는 느낌이었다. 삼촌이 갑작스런 교통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일년이 채 안 돼 숙모는 노란 머리의 미국인과 재혼을 했다. 덕분에 은상과 준호는 지구의 끝과 끝으로 멀어져야 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은상에겐 그 이후로 노란 머리의 동생이 둘이나 더 생겼다고 했다. 그 안에서 은상이 얼마나 외로웠을지를, 제 아무리 자기밖에 모르는 준호래도 짐작 못할 리가 없었다. 


"은상아."

"왜, 또."

"이제 미국 가지마. 나랑 같이 평생 한국서 살자." 

"……."

"내가 매일 바나나 우유 두 개씩 사줄게."


 곱게 눈을 접어 보이며 웃는 준호를 보며 은상은 문득 지금 이 순간이 꿈이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을 느꼈다. 미국에서 지내던 날 동안 그토록 꿈 꿔왔던 것처럼, 지금 이 순간도 단지 꿈일 뿐이면 어떡할지…. 불안해졌다. 낯선 환경과 새로운 가족들 틈에서 철저히 혼자로 자라야 했던 만큼 그리움은 배가 되곤 했다. 늘 은상에게 넘치는 사랑을 주었던 아빠와 다정하고 따뜻하던 고모네 가족, 그리고… 늘 내 뒤를 쫓던 동생 준호까지. 


"착한 동생이네, 우리 준호." 


  은상은 애써 웃어보이며 준호의 갈색빛 머리카락을 장난스레 헝클어 뜨렸다. 착한 동생이라는 낯간지러운 말에 준호는 우웩! 하고 토하는 시늉까지 하며 은상의 손을 밀어내곤 달아난다. 동생은 개뿔! 하며 점점 멀어지는 준호의 뒷모습을 보며 은상은 생각했다. 정말로 미국 따윈 두 번 다시 돌아가지 말아야 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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