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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야 (Tropical Night) 上

이은상 × 차준호




 차라리 시원하게 빗줄기가 쏟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탈탈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의 미적지근한 바람은 이 후덥지근한 열기를 식혀주는 데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여느덧 밤 열 시. 끈적거리며 땀이 차오르는 손바닥을 무릎 언저리에 닦아내곤 다시금 손가락 사이로 펜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책상 위로 어질러진 수백 장은 족히 되어 보이는 서류들을 보니 남아있던 의욕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저 서류뭉치들 속에 코를 박고 죽는 게 나을까…. 그런 우스운 고민을 진심으로 하고 있을 때쯤, 애써 관심 밖으로 밀어두려 했던 누군가의 낮은 목소리가 느릿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랑 연애할래요?”

 

 턱을 괸 자세로 모니터 화면만을 응시하던 그는 언제부터인지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허공에서 얽혀가는 시선 속에서 우리 둘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러나 나를 향해있는 그의 까만 눈동자가 이 더운 여름밤의 공기에 열기를 더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땀에 젖어 달라붙는 셔츠를 팔랑거리며 뒤늦게 서야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아님 그냥, 오늘 하루 나랑 자든가.”


 다시금 모니터를 향해 시선을 옮기며 그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며칠 째 이어지고 있는 이상고온 현상이 드디어 이성의 끈마저 녹여버린 게 틀림없었다. 나는 힘을 준 손으로 쥐고 있던 펜을 내리곤,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두 번째가, 차라리 낫겠네요.”

 

 

 

 





열대야 (Tropical Night) 上 
w. lovesome 
 

 

 

 

“아, 저기… 자, 잠시 만요…!”

 

 어깨를 누르는 묵직한 무게감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당황스런 마음에 꽤 힘을 준 손길로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었다. 어느새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체온이 손바닥을 타고 짜릿 하게 전해졌다. 미쳤어, 미쳤어. 마치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어진 일련의 상황들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조금 전 그와 뜨겁게 나눴던 키스와는 어울리지 않게 얼굴을 붉히며 당황스럽게 눈을 껌뻑거렸다. 

 나를 이끄는 그의 손을 잡은 채로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기까지는 채 5분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잘빠진 그의 외제차 안으로 들어앉자마자 시트를 최대한 뒤로 젖히곤 서로의 몸을 겹치며 뜨거운 키스를 나눴다. 그리고 내가, 이 내 두 손으로, 그의 셔츠까지 직접 벗겨내지 않았던가. 그 모든 게 불과 사무실에서 야근을 하던 와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맞닿은 서로의 살결에 내가 잃었던 이성을 찾기 전까지의 상황 말이다.

 

 


“죄, 죄송해요. 생각해보니까 좀 갑작스러워서… 어, 저기 그러니까…”

“…….”


 
 애써 그의 시선을 피해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리며 어색한 헛기침만 늘어놓는 나를, 그는 별다른 반응 없이 내려다 볼 뿐이었다. 지금 이 상황 자체도 숨이 막힐 만큼 어색했지만, 그와 단 둘이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그것도 그의 단단한 두 팔 사이에 셔츠까지 벗어젖힌 채로)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던 것은 처음이라 당장이라도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여긴 장소도 좀 그렇고, 또, 어, 사실, 아, 그래, 콘돔! 콘돔도 없고…”

 
 콘돔이라니…. 이 상황에서 그런 민망한 단어를 찾고 있는 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기까지 좋다고 끌려올 땐 언제고 이제와 이런 말도 안 되는 변명들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내 스스로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안 그래도 좁은 차 안의 더운 공기와 코 끝에 와 닿는 정리되지 않은 그의 숨결에 죽을 것 같은데, 그의 시선은 정말이지 내 온 몸을 다 태워버릴 것만 같았다.


 
 사실 나는 꽉 막힌 타입은 아니었고, 원나잇 경험도 두 세 번 정도는 있는, 그러니까 꽤 오픈된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니 콘돔이고 나발이고 그냥 마음이 내키는 대로 그와 섹스 한 번 정도는 눈 딱 감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가 어딘가. 우리가 누군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런 현실적인 문제들이 그제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었다. 여기는 회사의 지하 주차장이었고, 그는 내 직장 상사였으며(그것도 감히 범접할 수조차 없는 말단 사원과 본부장느님!), 우리는 야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단 말이다! 어제 새로 설치한 에어컨이 갑자기 맛이 가지만 않았어도 열대야 따위는 우리의 이성에 전혀 영향을 끼칠 사안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싫으면 관둬요. 나중에 날 원망하는 건 곤란하니까.”

“죄송해요…….”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기만 하던 그는 그제야 상체를 일으키곤 옆자리의 운전석으로 몸을 옮겼다. 그와 동시에 나 역시 튕기듯 상체를 일으켜 세우곤, 구석으로 처박힌 셔츠를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그 모습이 조금 찌질해 보였음은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남은 일을 마저 하려면 옷은 입어야 했으니까.

 
 

“근데 나 콘돔 있어요.”

 
 그러나… 이어진 그의 한 마디에 허겁지겁 단추를 채우던 손길이 미끄러지듯 어긋나고 말았다. 난 멍해진 표정으로 눈만 껌뻑이며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뭐 지금 어쩌자는 얘기지? 콘돔 있으니까 다시 하던 거 마저 하자는 얘긴가? 아니, 그나저나 차 안에 그런 걸 준비해놓고 다닐 만큼 이런 상황이 익숙한 사람이었나…. 그럴 주제도 안 되면서 괜히 실망스런 마음에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가늘어 진 것도 같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콘솔 박스에서 탐스런 딸기가 그려진 콘돔을 꺼내 내 무릎 위로 던지듯 건네주었다. 퍽이나 잘 어울린다. 딸기향 콘돔이라니….

 

 
“근데 아무래도 장소가 좀 그렇죠?”

“아, 저기, 그게……”

“남은 일은 그냥 내일 출근해서 해요. 집까지 데려다 줄게요.”

 

 그는 그제야 자신의 셔츠에 양 팔을 끼워 넣곤 차에 시동을 걸었다. 하나하나 단추를 잠가 가는 그의 손끝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를 처음 만나던 날이 떠올랐다. 비현실적인 그의 외모에 한 번 놀랐고, 그가 나랑 동갑이란 사실에 두 번 놀랐었다. 낙하산이란 건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어중간한 위치의 이사들의 자식이라면 낙하산이라며 뒤에서 실컷 씹어줬겠지만, 이건 뭐, 회사 대표의 금지옥엽 외동아들이라니 무조건 떠받들고 알아서 기어야 하는 것이었다. 뭐, 암튼, 그의 유난스럽게도 잘생긴 외모 때문인지, 아니면 입사 1년 차, 말단 사원인 나는 다가갈 수 없는 회사 내 서열 때문인지, 우리는 딱히 접점을 찾지 못한 채 제대로 된 대화 한 마디 나눠볼 기회도 갖지 못했었다. 감히 그의 눈에 들어보려 애를 쓰는 의미 없는 짓도 하지 않았다. 나는 천성이 게이였고, 아무리 내 스타일인 남자라 해도 노멀에게 함부로 들이대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는 예상과 달리 노멀이 아니었다. 일주일 전, 우리는 회사 외의 장소에서 난생 처음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 장소가 내가 즐겨 찾던 게이바였다. 그 후로 그의 시선을 은근슬쩍 의식했음은 인정한다. 그는 욕심낼 수밖에 없는, 완벽에 가까운 남자였으니까.

 

 

“집이 어디에요?”

“안 데려다 주셔도 괜찮아요. 지하철 타고 가면 금방이라…”

“데려다 줄게요. 그래야 물이라도 한 잔 얻어먹죠.”

“네…?”

“라면이라도 끓여주면 더 좋고요.”

 

 이거… 도대체 무슨 의미인거지?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저 말인 즉슨, 지금 나를 데려다 주고 우리 집에서 물이라도 한잔 얻어먹겠단 얘기? 그러니까 즉, 우리 집에 함께 들어가겠단 얘기? 그래서 결국, 결국 꼭 저 딸기콘돔을 쓰고 말겠단…… 뭐, 그런 얘기?!!

 의미파악을 대충 끝낸 나는 얼굴은 점점 굳혀가며 눈만 껌뻑거렸다. 아까도 말했지만 낯선 남자와 침대에서 섹스 한 번 하는 게 무서운 게 아니었다. 아직 그와 나의 관계에는 사적인 것보다 공적인 것의 비중이 더 큰 관계였다. 그와 이런 식으로 얽히기 시작하면 문제가 되는 건 회사였다. 내가 취직 한번 제대로 해보겠다고 졸업유예를 3년이나 하면서 눈물의 백수생활 끝에 취직 한 회사란 말이다. 게이바에서 마주친 거야, 어차피 피차 떳떳할 거 없으니 그렇다 쳐도, 이런 식으로의 관계는 좀 곤란했다. 암. 그렇고말고! 아무리 이 남자가 재벌가 외동아들에 완벽의 표본이라고 해도 그건 안 될 일이었다. 나는 이런 관계를 잘 안다. 나부터도 그랬다. 남자와 연애를 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남녀 간의 연애와는 다르다. 진지한 마음보단 호기심이 먼저 작용하곤 하니까. 마음이 깊어질수록 상처만 크니까.

 

 

“왜 말이 없어요? 집이 어디냐 구요.”

“저기요, 본부장님.”

“이은상.”

“네?”

“내 이름 이은상이에요. 이름 불러요.”

 


 점점 당황스러워져 간다. 쓸 데 없이 단호해 보이는 그의 어조에 딱 잘라 거절할 수도 없다. 아니, 사실은 다 핑계인지도 모른다. 옆에서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복잡하던 머리속은 이상하리만치 단순해져가고 있었다.



"뭘 그렇게 봐요."


 
 사이드 미러를 힐끗 보며 운전을 이어가는 커다란 눈동자와 오똑하니 솟아오른 콧날, 손목에 채워진 남자다움의 상징과도 같은 알이 커다란 시계와 운전대를 꽉 쥐고 있는 손등 위로 불거져 나온 미칠듯이 섹시한 핏줄까지. 본부장이라는 이 남자, 새삼 느끼지만… 너무 완벽하잖아.




"그럼 라면이라도 드시고 가… 실래요?"

 
 떨리는 손끝을 감추고,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의 차 네비에 직접 집 주소를 찍어줬다. 그래, 차준호. 인생 별 거 있냐? 오늘 밤. 이 남자. 내가 쓰러트려 주겠어. 결의를 다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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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노란딱지에 관하여.